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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서 만나는 동시대 욕망과 현대미술의 초상

   동굴 이야기는 오래되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의 우화에서 동굴 속 ‘이데아(idea)’라는 비유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동굴 속의 빛에 의한 그림자 허상이라는 오랜 이야기는 서양철학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가깝게는 서양미술사의 시작을 동굴벽화에서 찾는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라스코 동굴벽화 등에 그려진 사냥 그림을 보며, 그것이 고대인들의 염원과 바램이었음을 상상한다. 농경과 정착으로 인해 사회가 복잡하게 분화되기 이전 동굴에 살았던 고대인들이 그날의 휴식을 취하며, 내일의 안녕과 풍요, 그리고 생존을 위한 바램을 담은 것이 바로 동굴벽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굴벽화는 인간의 순수하고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이자, 더 나은 내일의 삶에 대한 욕망을 투사한 종교적 행위로서의 예술이다.

   자신의 일상과 삶의 내러티브에 기반한 “야간운전” 시리즈를 시작으로, 커뮤니티 아트로 선보인 “아트 택시(Art-Taxi) 프로젝트”,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기반으로 통일을 염원하는 미디어와 설치 영상 작품, 그리고 최근 공동체의 민담을 리서치하고 이를 퍼포먼스로 엮어낸 것까지, 그간 홍원석은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횡단하며 전방위적 예술창작을 왕성하게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홍원석은 이번 개인전에서 동굴 이야기로 화두를 던진다.

   그간 여러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었던 홍원석의 예술은 자신의 수많은 드로잉에 기반을 둔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드로잉이 작품 시작을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 혹은 보조적인 것으로 다뤄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드로잉 자체가 작품이자 예술 창작의 한 방법론으로서 그 위치를 굳건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홍원석은 온라인 드로잉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그에게 드로잉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해 가는 근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창작방법론인 셈이다. 홍원석은 그날그날의 일기와 같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물론이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거리까지 자신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된 많은 것들을 드로잉에 담았다. 따라서 그의 드로잉은 개인 삶의 내러티브가 섞여 솔직하고 몹시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동시대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산물로서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홍원석은 그간의 예술 창작의 궤적을 이어, 이번 전시에서는 드로잉에 기반한 벽화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그는 휴대전화 속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이를 자신의 드로잉과 믹스해 현대판 동굴벽화로 재현한다. 그렇다면 그가 채집한 휴대전화 속의 이미지란 무엇인가? SNS 속의 숱한 사진들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과시하기 위해 찍어대는 맛있는 음식, 화려한 명품가방과 신발, 옷, 그리고 그 사진을 돋보이게 하는 멋진 장소까지. 이것을 다시 소비하는 우리 자신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욕망이라고 말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거창한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많은 사진은 우리의 욕망을 거울처럼 비춘다. 이처럼 홍원석은 동시대 욕망을 회화로 번안하고자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벽화에는 인생무상의 의미를 담아낸 ‘바니타스(Vanitas)’의 정물화처럼 미술사의 여러 장면을 병치한다. 미술사란 무엇인가?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 즉 그리스·로마 신화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Oedipus complex)처럼 기존의 역사를 끊임없이 뒤엎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며 진보를 말한 것이 바로 부계적 담론 속의 역사였다. 미술사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홍원석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 노트에 “킬킬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언어유희, 그러니까 비웃음과 조롱의 형용사이자, 죽인다(Kill)라는 의미를 동시에 담음으로써 동시대 현대미술의 공허함에 주목한다.

   따라서 전시장 벽면에 직접 그려진 그의 회화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SNS 속의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미술사의 한 장면과 작가 개인의 내밀한 내면에서 낚아 올린 알 수 없는 것들이 믹스되어 기인한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때 홍원석은 형광 안료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으로 점철된 동시대의 욕망을 화려하게 채색한다. 또한, 몸으로 수행한 퍼포먼스의 흔적은 거친 붓질로 전시장 벽면에 남게 되고, 관객은 영상으로 기록된 퍼포먼스를 다시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미술의 시작이자, 인류 역사 초기의 기억을 더듬어 이를 다시 동시대 현대미술로 번안한 홍원석의 벽화는 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동시대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 미술사의 명화들을 기이하게 믹스한다. 우리는 그가 회화로 번안한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욕망, 타인의 욕망 사이를 오가며 현대인의 공허함을 바라본다. 이때 욕망의 팔루스(Phallus)는 비어있어,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점점 이론으로 무장해 알 수 없이 난해해진, 침몰해가는 배같은 현대미술의 현재를 본다. 그가 재현한 친숙하면서도 낯선 기이한 벽화는 우리 자신을 반추하게 하고, 동시대 현대미술의 텅 빈 풍경을 동시에 만나게 한다.

 

고경옥(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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